The Div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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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3. 31. 수. - 04. 03. 토.
· Open: 2021. 03. 31. 수. 17:00
· 전시 운영시간: 14:00 - 21:30
청년예술청 그레이룸
있으면 가장 안되는 곳에 가장 어설프게 설치된 육상트랙,
난입한 다리들에 의해 뚫리는 수압을 목격할 당신을 상상했다.
- 조희수
─
전시 서문
프레임 내부-외부 사이에서 바톤터치 하기
일종의 ‘세계(관)’, 그러니까 어떤 규칙과 법칙이 지배하고 돌아가는(작동하는) 장소는 전제적으로 공간적인 영역을 구획한다. 문필가의 서예, 공연 예술의 무대, 화가의 페인팅 등등, 이것들은 사람의 생각이나 감각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담는 수용체이다. 영역 구분 또는 구획을 통해서 세계(관) 전체를 질서 지어질 때, 그 패턴에 균열이 생기게 되면 갑자기 혼란이 발생한다. 우리는 이 혼란을 파국적인 난장판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혼란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거나 시사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질서의 붕괴와 파탄이며, 그에 따라 부여되는 개별 요소들의 등가성이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혼돈이란 질서의 재정립을 가리킨다. 예컨대 스포츠 경기의 생중계 방송을 보다가, 관객 중의 한 명(처음에는 관객인지 심판인지 취재 관련 관계자인지 모른다.)이 경기장에 뛰어 들어가면 침입한 사람이 전면화되어 선수들과 경기 자체는 배경으로 물러서게 된다. 초점 변환 또는 교환 방식이야말로 여기서 말하는 혼돈이다. 그것은 모든 요소가 같은 위상에 서게 되는 것과 달리, 바꿔치기의 결과 즉 중심의 함몰과 배경의 부각을 통해 재정립된 질서를 가리킨다.
조희수의 <The Divers> 또한 바꿔치기를 통한 관계(적 변화)를 보여준다. 영상은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누어진다. 도니 한복판에 경기장의 트랙처럼 선을 긋는 장면과 이 선을 따라 퍼포머가 번갈아 뛰는 장면이다. 두 장면을 보고 우리는 전자를 준비 과정으로 보고, 후자를 본경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감상자는 선을 긋는 컷을 먼저 본 다음, 이 선을 따라 달리는 장면을 보고 이어지는 관계라 유추할 수 있다. 유추 가능한 다른 이유가 있다면, 두 번째 파트에 편집이 디자인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올림픽 경기 중계 장면처럼 보여주는 시각적 효과, 바로 시간을 세는 장면이 나오면서 우리는 이제 본 경기를 보는 것과 같은 감각을 얻는다. 두 파트로 구성된 작품이, 어떻게 바꿔치기의 결과를 가시화할까. 먼저 도시 한복판에 선을 긋는 행위와 달리는 행위만 보면 우리는 경기를 보는 시청자가 된다. 그런데 그 공간에서 달리는 인물을 보는 사람들은 관객의 위치에 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경기를 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중이기 전에 대중이자 다중이고, 어느 순간 빠르게 달려가는 등장인물(퍼포머)을 보고 시선을 강탈당한 목격자가 된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목격자가 된다. <The Divers>에서 사람들은 퍼포머의 행위를 순간적으로 보고 갑자기 시선을 빼앗기게 되면서 각자의 세계(관)이 찢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뛰는 퍼포머는 경기장에 난입한 관중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들은 도시 한복판에 균열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고정시킨다. 한편 바꿔치기의 결과는 작품 내부적으로 이루어진다. 고정된 시점에서 선을 따라가면서 보는 것과 대조적으로, 퍼포머가 뛰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자꾸 프레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생중계보다 매끄럽지 않은 영상에서 퍼포머는 프레임을 종종 벗어날 뿐만 아니라 영상의 끝에서 시간이 여전히 흘러가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영상의 상영 시간을 벗어나기도 한다. 조희수의 이번 작품은 지극히 영상적, 즉 이미지가 흐르는 방식에 집중하여 바꿔치기가 이루어진다. 선을 긋는 시간과 선을 따라 돌아가는 시간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함유하고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선을 긋는 시간은 행위의 경과 또는 과정을 포착하지만 고정된 시점(즉 ‘정점定點’)을 통해 촬영되기 때문에 시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궁극적으로 ‘드론 뷰’라는 또 다른 고정된 시점으로 승화된다.) 한편 작품에서 퍼포먼스 기록은 프레임에서 벗어나거나 따라잡지 못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생중계나 영화가 장면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때 ‘짜깁기’가 전제되는 지점을 부각하면서 퍼포머가 달리는 기록을 분할적인 성격으로 보여준다.
<The Divers>는 관객과 중심인물의 관계를 바꿔치기할 뿐만 아니라 영상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성의 관계를 바꿔치기한다. 그 결과,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말하는 만들어진/형성된 세계(관)에 뛰어 들어가 그 속에서 벌이는 교환적 시도의 장이 된다. 말하자면 제목과 작품에서 암시된 ‘Diving’ 또는 ‘Diver’는 기존의 세계관이나 현실에 ‘뛰어 들어가면서’ 행위 대신 수행성의 힘을 발휘하는 기점을 작품이라는 공간에 세운다. 릴레이라는 형식이 같은 패턴으로 빙빙 돌기만 하는 모티프처럼 보이지만, 실상 작품은 바꿔치기하는 바톤터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서 ‘러닝타임’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대신, 기존의 질서를 재정립하여 역할 교환하는 장, 즉 관계가 교란되는 장으로 출현한다.
- 콘노유키
틀림없이 사람들은 행동의 회로에서 새로운 규정들이 출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여로 for The Divers
부르디외는 “어떤 사람이 기술적 역량을 취득하는 성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를 역량 있는 사람으로 지목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뛰게 하기 위해서는 라인을 그리면 된다고. 다이빙 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 찍으면 된다고. 이미지의 유통 방식은 아주 잠시만, 그냥 정면을 응시하는데 사용되면 그만이라고.
드론으로 촬영된 카메라의 전능한 시선은 강남역 길바닥의 노이즈와 기호들을 즉시 내쫓는다. 드론뷰가 아주 잠시만 의탁할 수 있는 시선의 대리자라면, 퍼포머의 응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관람할 수 있는 그 시선의 의탁에 대해서 질문한다. '질문하기'란 산문적 수사법에 그치기보다, 촬영됨으로써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조건들을 잃어버린 (화면에서 보이는 행인들만이 보았을 무엇을) 몸이 다시금 되찾기 위한 발화의 방식이다.
“그 공간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은” 콘노 유키가 언급했듯이 “관객의 위치에 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관객의 위치에 선다. 고개를 돌아본 행인들에게 강남역이라는 공간은 새로운 교환 관계가 성립된 곳으로 전환 되었거나 전환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시실에 들어선 나에게 “고개를 돌린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선의 기술적, 담론적 테크닉들을 경유하여 현장을 추체험하는 것? 스크린의 물리적 크기에 압도되어 현장성이 재현되는 것? 기록된 몸이 다시금 수행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그러한 종류의 추체험에 의존하는 것일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사태에 휘말리고 개입돼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퍼포먼스가 개방하는 하나의 특징이라면 전시장에서 이것은 차단된다. 시각의 지평에 개입되는 요소는 최소화된다. 그렇다면 봄으로써 보는 것 내부에서 뒤를 돌아볼 수 있을까. "난입한 다리들에 의해 뚫리는 수압"을 보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할까. 여기서 달리는 것은 퍼포머가 아니다. 달리는 것이 퍼포머라고 말하면 ‘도큐멘테이션’이 논의에 개입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클로즈업해서 들어가고 시점과 프레임에서 이탈과 진입을 반복하는, 촬영되어 표면에 투사되고 있는 이미지라고 한정하자.
몸은 스크린-표면에서 이미지라는 새로운 몸을 얻었지만, 몸과 움직임의 선험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무력해지는 것처럼 ‘몸 자체’라는 관념을 재현하려는 듯한 숨가쁨의 영상적 변환 역시 숭배에 그칠 수 있다. 그렇게 몸-이미지의 현존성에 최대한 들러붙기 위해 필요한 스크린의 크기였다면 차라리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그리고 실제 고개를 돌렸을 때 전시장 맞은편의 거울은 이 스크린을 축소해내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포함시키는데, 전시장의 구조는 이 같은 예측을 한걸음 앞질러 관객에게 작업이 무엇을 성취할지 보라고 되돌려놓는다). 그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신체적 사실로 제한하려고 하지만, 기호들의 네트워크를 벗어나는 몸의 순수함은 순간이며 이 순간으로부터 구축되는 관계 혹은 구축하려고 뻗어 나가는 힘이 없다면 뜀박질은 다시금 준비되어있는 사회적 재현의 형식으로 퇴각한다.
《The Divers》는 기호들(강남역, 노이즈, 자본, 질주)의 관계를 짜맞추거나 (심지어 긍정적일지라도) 몸이 호명되는 관습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의 가능성에 몸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정립되어있다. 질문하기, 그것은 질문을 받아줄 상대가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 응답해올 타자를 그 질문으로부터 구성해낸다. 그러니까 몸은 그로부터 작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감각의 중심으로 설정되었다기보다 (개개의 작업이 가질 매체성을 생각하면) 자신이 연결될 바깥을 찾아 나서는 또다른 지지체로 작동한다. 그렇게 몸-이미지의 가능성을 새로운 제약들 위에서 성취하기 위해서, 경기의 규칙으로 도입된 것은 ‘이어 달리라’는 것이다.
지금! 이라는 호명과 함께 넘겨지는 바톤의 다음이 아니라 그것을 건네는 순간만이 반복되듯, 달려나가는 이미지의 힘은 자신에게로 소급되지 않고 프레임 바깥으로 향한다. 이때 프레임을 이탈하는 몸은 핸드헬드로 따라붙는 대상의 역동성을 증명해주려는 일시적인 부재는 아닌데, 특히나 드론뷰에서 프레임은 달리고 있는 퍼포머의 몸이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콘노 유키가 “프레임 내부-외부 사이에서 바톤터치 하기”라고 이름한 것처럼, 종종 프레임에서 퍼포머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빠져 나가고 직전까지 배경에 불과했던 것이 전면화될 때에, 그곳은 지금 프레임에 보이지 않는 퍼포머가 다시 들어갈 공간을 암시하기보다 1부라고 일컬을 강남역 길바닥에서의 경험이 동등한 위격으로 다시금 소환되며 (누군가에게는 지옥과 같을 장소일 그곳의) 주체성을 다시 조명한다.
드론뷰와 핸드헬드의 반복적인 전환, 그리고 그 내부에서 대상-공간-주체성의 반복적인 전환을 ‘학습적’이라고 부를 법하다. 그것은 강남역이라는 공간 특유의 기호적/담론적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또 질주하는 몸-이미지를 (대항이나 예외성이라는, 사실상 종속의 외부적 버전인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그것을 (자본과 폭력이라는 라벨링을 통해) 환원하지도 않으면서, 보고 있을 때 보고 있지 않은 것을 떠올리게 하고 보고 있지 않을 때 보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하며 서로에게로 힘을 투과한다.
루프라는 닫힌 형상과 몸의 자족적 이미지를 개방의 계기로 구조화한 작업에 대하여 이 글은 쓰고 있다. 영상이 끝나고서야 등장하는 “Start”, 이미 끝난 제한 시간, 제작 단계의 가제를 지칭하는 “Working titles”... 이러한 언어적 표현들은 그것을 지각하는 자의 경험이 투과할 여지를 만들고 그것과 결합해서만 작동하도록 만든 구조가 없다면[1], 경험의 과정이자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개방성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이라는 작업 외부의 것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The Divers》의 산문적 변환이라기에는 이로부터 받은 감각인 낙차의 모사에 그치겠지만, 이 글을 지시문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
제목으로 되돌아 갈 것, 그리고 재독하지 말 것.
참조문헌
프레임 내부 - 외부 사이에서 바톤터치하기, 콘노 유키
─────
[1] “이런 식으로 '다공성'을 확대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 다공성이 정말 작동하는(경험이 침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입 각도에 따라 경험과 다르게 결합하며 질적, 양적 증대를 이룬 경험으로 연결되는) 유의미한 언어 건축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을텐데 그 질문이 부당할 순 있다(「말장난을 하는 이유」, 하유월, 2021)”.
외화면 - {우정, 결투, 공생} - 외화면, 김혜림
문화와 정치, 피에르 부르디외
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 - 퐁티
안티 - 오이디푸스,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Date
2021. 03. 31. 수. - 04. 03. 토.
· Open: 2021. 03. 31. 수. 17:00
· 전시 운영시간: 14:00 -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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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예술청 그레이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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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가장 안되는 곳에 가장 어설프게 설치된 육상트랙,
난입한 다리들에 의해 뚫리는 수압을 목격할 당신을 상상했다.
- 조희수
─
전시 서문
프레임 내부-외부 사이에서 바톤터치 하기
일종의 ‘세계(관)’, 그러니까 어떤 규칙과 법칙이 지배하고 돌아가는(작동하는) 장소는 전제적으로 공간적인 영역을 구획한다. 문필가의 서예, 공연 예술의 무대, 화가의 페인팅 등등, 이것들은 사람의 생각이나 감각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담는 수용체이다. 영역 구분 또는 구획을 통해서 세계(관) 전체를 질서 지어질 때, 그 패턴에 균열이 생기게 되면 갑자기 혼란이 발생한다. 우리는 이 혼란을 파국적인 난장판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혼란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거나 시사하는 바는, 일차적으로 질서의 붕괴와 파탄이며, 그에 따라 부여되는 개별 요소들의 등가성이다. 그런데 정작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혼돈이란 질서의 재정립을 가리킨다. 예컨대 스포츠 경기의 생중계 방송을 보다가, 관객 중의 한 명(처음에는 관객인지 심판인지 취재 관련 관계자인지 모른다.)이 경기장에 뛰어 들어가면 침입한 사람이 전면화되어 선수들과 경기 자체는 배경으로 물러서게 된다. 초점 변환 또는 교환 방식이야말로 여기서 말하는 혼돈이다. 그것은 모든 요소가 같은 위상에 서게 되는 것과 달리, 바꿔치기의 결과 즉 중심의 함몰과 배경의 부각을 통해 재정립된 질서를 가리킨다.
조희수의 <The Divers> 또한 바꿔치기를 통한 관계(적 변화)를 보여준다. 영상은 크게 두 가지 파트로 나누어진다. 도니 한복판에 경기장의 트랙처럼 선을 긋는 장면과 이 선을 따라 퍼포머가 번갈아 뛰는 장면이다. 두 장면을 보고 우리는 전자를 준비 과정으로 보고, 후자를 본경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감상자는 선을 긋는 컷을 먼저 본 다음, 이 선을 따라 달리는 장면을 보고 이어지는 관계라 유추할 수 있다. 유추 가능한 다른 이유가 있다면, 두 번째 파트에 편집이 디자인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올림픽 경기 중계 장면처럼 보여주는 시각적 효과, 바로 시간을 세는 장면이 나오면서 우리는 이제 본 경기를 보는 것과 같은 감각을 얻는다. 두 파트로 구성된 작품이, 어떻게 바꿔치기의 결과를 가시화할까. 먼저 도시 한복판에 선을 긋는 행위와 달리는 행위만 보면 우리는 경기를 보는 시청자가 된다. 그런데 그 공간에서 달리는 인물을 보는 사람들은 관객의 위치에 서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경기를 보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방문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관중이기 전에 대중이자 다중이고, 어느 순간 빠르게 달려가는 등장인물(퍼포머)을 보고 시선을 강탈당한 목격자가 된다―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목격자가 된다. <The Divers>에서 사람들은 퍼포머의 행위를 순간적으로 보고 갑자기 시선을 빼앗기게 되면서 각자의 세계(관)이 찢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뛰는 퍼포머는 경기장에 난입한 관중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된다. 이들은 도시 한복판에 균열을 일으키며, 사람들의 시선을 순간적으로 고정시킨다. 한편 바꿔치기의 결과는 작품 내부적으로 이루어진다. 고정된 시점에서 선을 따라가면서 보는 것과 대조적으로, 퍼포머가 뛰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자꾸 프레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생중계보다 매끄럽지 않은 영상에서 퍼포머는 프레임을 종종 벗어날 뿐만 아니라 영상의 끝에서 시간이 여전히 흘러가는 것으로 묘사되면서 영상의 상영 시간을 벗어나기도 한다. 조희수의 이번 작품은 지극히 영상적, 즉 이미지가 흐르는 방식에 집중하여 바꿔치기가 이루어진다. 선을 긋는 시간과 선을 따라 돌아가는 시간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함유하고 보여주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선을 긋는 시간은 행위의 경과 또는 과정을 포착하지만 고정된 시점(즉 ‘정점定點’)을 통해 촬영되기 때문에 시간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궁극적으로 ‘드론 뷰’라는 또 다른 고정된 시점으로 승화된다.) 한편 작품에서 퍼포먼스 기록은 프레임에서 벗어나거나 따라잡지 못하는 장면을 포착한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생중계나 영화가 장면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때 ‘짜깁기’가 전제되는 지점을 부각하면서 퍼포머가 달리는 기록을 분할적인 성격으로 보여준다.
<The Divers>는 관객과 중심인물의 관계를 바꿔치기할 뿐만 아니라 영상이라는 공간에서 시간성의 관계를 바꿔치기한다. 그 결과, 작품은 넓은 의미에서 말하는 만들어진/형성된 세계(관)에 뛰어 들어가 그 속에서 벌이는 교환적 시도의 장이 된다. 말하자면 제목과 작품에서 암시된 ‘Diving’ 또는 ‘Diver’는 기존의 세계관이나 현실에 ‘뛰어 들어가면서’ 행위 대신 수행성의 힘을 발휘하는 기점을 작품이라는 공간에 세운다. 릴레이라는 형식이 같은 패턴으로 빙빙 돌기만 하는 모티프처럼 보이지만, 실상 작품은 바꿔치기하는 바톤터치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서 ‘러닝타임’은 선형적인 시간의 흐름 대신, 기존의 질서를 재정립하여 역할 교환하는 장, 즉 관계가 교란되는 장으로 출현한다.
- 콘노유키
Review
틀림없이 사람들은 행동의 회로에서 새로운 규정들이 출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여로 for The Divers
부르디외는 “어떤 사람이 기술적 역량을 취득하는 성향을 갖추기 위해서는, 그를 역량 있는 사람으로 지목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보자. 뛰게 하기 위해서는 라인을 그리면 된다고. 다이빙 하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내려 찍으면 된다고. 이미지의 유통 방식은 아주 잠시만, 그냥 정면을 응시하는데 사용되면 그만이라고.
드론으로 촬영된 카메라의 전능한 시선은 강남역 길바닥의 노이즈와 기호들을 즉시 내쫓는다. 드론뷰가 아주 잠시만 의탁할 수 있는 시선의 대리자라면, 퍼포머의 응시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관람할 수 있는 그 시선의 의탁에 대해서 질문한다. '질문하기'란 산문적 수사법에 그치기보다, 촬영됨으로써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조건들을 잃어버린 (화면에서 보이는 행인들만이 보았을 무엇을) 몸이 다시금 되찾기 위한 발화의 방식이다.
“그 공간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보는 사람들은” 콘노 유키가 언급했듯이 “관객의 위치에 서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관객의 위치에 선다. 고개를 돌아본 행인들에게 강남역이라는 공간은 새로운 교환 관계가 성립된 곳으로 전환 되었거나 전환 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전시실에 들어선 나에게 “고개를 돌린다”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선의 기술적, 담론적 테크닉들을 경유하여 현장을 추체험하는 것? 스크린의 물리적 크기에 압도되어 현장성이 재현되는 것? 기록된 몸이 다시금 수행성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그러한 종류의 추체험에 의존하는 것일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사태에 휘말리고 개입돼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퍼포먼스가 개방하는 하나의 특징이라면 전시장에서 이것은 차단된다. 시각의 지평에 개입되는 요소는 최소화된다. 그렇다면 봄으로써 보는 것 내부에서 뒤를 돌아볼 수 있을까. "난입한 다리들에 의해 뚫리는 수압"을 보기 위해 무엇을 보아야 할까. 여기서 달리는 것은 퍼포머가 아니다. 달리는 것이 퍼포머라고 말하면 ‘도큐멘테이션’이 논의에 개입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클로즈업해서 들어가고 시점과 프레임에서 이탈과 진입을 반복하는, 촬영되어 표면에 투사되고 있는 이미지라고 한정하자.
몸은 스크린-표면에서 이미지라는 새로운 몸을 얻었지만, 몸과 움직임의 선험적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무력해지는 것처럼 ‘몸 자체’라는 관념을 재현하려는 듯한 숨가쁨의 영상적 변환 역시 숭배에 그칠 수 있다. 그렇게 몸-이미지의 현존성에 최대한 들러붙기 위해 필요한 스크린의 크기였다면 차라리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그리고 실제 고개를 돌렸을 때 전시장 맞은편의 거울은 이 스크린을 축소해내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포함시키는데, 전시장의 구조는 이 같은 예측을 한걸음 앞질러 관객에게 작업이 무엇을 성취할지 보라고 되돌려놓는다). 그것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신체적 사실로 제한하려고 하지만, 기호들의 네트워크를 벗어나는 몸의 순수함은 순간이며 이 순간으로부터 구축되는 관계 혹은 구축하려고 뻗어 나가는 힘이 없다면 뜀박질은 다시금 준비되어있는 사회적 재현의 형식으로 퇴각한다.
《The Divers》는 기호들(강남역, 노이즈, 자본, 질주)의 관계를 짜맞추거나 (심지어 긍정적일지라도) 몸이 호명되는 관습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의 가능성에 몸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정립되어있다. 질문하기, 그것은 질문을 받아줄 상대가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 응답해올 타자를 그 질문으로부터 구성해낸다. 그러니까 몸은 그로부터 작업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감각의 중심으로 설정되었다기보다 (개개의 작업이 가질 매체성을 생각하면) 자신이 연결될 바깥을 찾아 나서는 또다른 지지체로 작동한다. 그렇게 몸-이미지의 가능성을 새로운 제약들 위에서 성취하기 위해서, 경기의 규칙으로 도입된 것은 ‘이어 달리라’는 것이다.
지금! 이라는 호명과 함께 넘겨지는 바톤의 다음이 아니라 그것을 건네는 순간만이 반복되듯, 달려나가는 이미지의 힘은 자신에게로 소급되지 않고 프레임 바깥으로 향한다. 이때 프레임을 이탈하는 몸은 핸드헬드로 따라붙는 대상의 역동성을 증명해주려는 일시적인 부재는 아닌데, 특히나 드론뷰에서 프레임은 달리고 있는 퍼포머의 몸이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다. 콘노 유키가 “프레임 내부-외부 사이에서 바톤터치 하기”라고 이름한 것처럼, 종종 프레임에서 퍼포머가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빠져 나가고 직전까지 배경에 불과했던 것이 전면화될 때에, 그곳은 지금 프레임에 보이지 않는 퍼포머가 다시 들어갈 공간을 암시하기보다 1부라고 일컬을 강남역 길바닥에서의 경험이 동등한 위격으로 다시금 소환되며 (누군가에게는 지옥과 같을 장소일 그곳의) 주체성을 다시 조명한다.
드론뷰와 핸드헬드의 반복적인 전환, 그리고 그 내부에서 대상-공간-주체성의 반복적인 전환을 ‘학습적’이라고 부를 법하다. 그것은 강남역이라는 공간 특유의 기호적/담론적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또 질주하는 몸-이미지를 (대항이나 예외성이라는, 사실상 종속의 외부적 버전인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 그것을 (자본과 폭력이라는 라벨링을 통해) 환원하지도 않으면서, 보고 있을 때 보고 있지 않은 것을 떠올리게 하고 보고 있지 않을 때 보고 있는 것을 떠올리게 하며 서로에게로 힘을 투과한다.
루프라는 닫힌 형상과 몸의 자족적 이미지를 개방의 계기로 구조화한 작업에 대하여 이 글은 쓰고 있다. 영상이 끝나고서야 등장하는 “Start”, 이미 끝난 제한 시간, 제작 단계의 가제를 지칭하는 “Working titles”... 이러한 언어적 표현들은 그것을 지각하는 자의 경험이 투과할 여지를 만들고 그것과 결합해서만 작동하도록 만든 구조가 없다면[1], 경험의 과정이자 결과로서 만들어지는 개방성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성’이라는 작업 외부의 것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이 글은 어떻게 끝낼 수 있을까? 《The Divers》의 산문적 변환이라기에는 이로부터 받은 감각인 낙차의 모사에 그치겠지만, 이 글을 지시문으로 마무리 하고 싶다.
제목으로 되돌아 갈 것, 그리고 재독하지 말 것.
참조문헌
프레임 내부 - 외부 사이에서 바톤터치하기, 콘노 유키
─────
[1] “이런 식으로 '다공성'을 확대해야한다고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 다공성이 정말 작동하는(경험이 침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입 각도에 따라 경험과 다르게 결합하며 질적, 양적 증대를 이룬 경험으로 연결되는) 유의미한 언어 건축인지에 대한 질문이 남을텐데 그 질문이 부당할 순 있다(「말장난을 하는 이유」, 하유월, 2021)”.
외화면 - {우정, 결투, 공생} - 외화면, 김혜림
문화와 정치, 피에르 부르디외
지각의 현상학, 모리스 메를로 - 퐁티
안티 - 오이디푸스,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PHOTOGRAPH
<스페이스 랩: 아직> The Divers- 사진: 이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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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청년예술청 공동운영단 기획사업 [스페이스 랩: 아직] 2차 공모 선정작으로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청이 지원합니다.